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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詩는 21세기의 시운동의 모델이라고???...
2017년 03월 29일 22시 26분  조회:2448  추천:0  작성자: 죽림
형이상詩의 특징과 현대적인 이해 

/ 최 규 철 



♠ 머리말

격돌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물질문명과 배금주의 사상에 떠밀려 갈수록 시의 입지조건은 열악해지고 그 존재의의마저 상실해가고 있는 이때에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시의 관심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시가 과연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등의 제반문제를 다시금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수용미학적인 관점에서 이것을 다루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앞으로의 한국시가 오늘의 시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을 극복하면서 먼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예언자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의 기법과 시 정신(esprit)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8)라 했다. 세상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가속도로 사회구조와 생활양상이 변천되면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나날이 달라지는 때에 그것을 수용하는 시의 형태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시의 흐름이 19세기의 주관적인 감정과 개성을 중시하던 낭만주의 시에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개인의 감정보다 지성을, 의미성보다 회화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틀과 결구력을 해체하고 풀어쓰기, 이야기시, 고백시 등의 자유분방한 시법을 구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이론으로 진행되면서 오늘의 한국시가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엘리엇이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시인들이 모든 사물을 결합하고 수용할 수 있는 통합적 감수성의 메커니즘의 결여애서 온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복잡다단하고 다원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시가 뿌리 내리고 자라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오직 시인 자신이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통합적 감수성을 가짐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원론적인 흑백논리나 패쇠되고 편향성을 지닌, 감수성의 분열 상태에서 사물을 보는 안목으로서는 그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바람직한 한국시의 방향은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사상과 사물, 등의 상반되고 이질화 된 경험을 통합하고 전체적인 생명체로 재창조하는 시법이 요구된다. 그리기 위해서는 통합된 감수성과 몰개성이론을 근거로 한 형이상시가 21세기의 시운동으로는 가장 적합한 시의 모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으로 형이상시가 미래를 향하여 전통적 가치와 창조적 가치를 창출해 가면서 미래지향적인 시의 전형적인 모델케이스가 되기 위해서는 형이상시를 지속적으로 연구발전해감으로써 한국적인 토양에 뿌리내리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해야 할 것이다. 

♠ 형이상학시의 대두 

17세기 영국의 정세는 엘리자베스 1세를 최후로 하는 튜더 왕조에 이어 제임스 1세로 시작하는 스튜어트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교와 정치체제가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였고, 지식과 개성에 대한 추구 경향이 증가하던 때였다. 

당시는 16세기 후반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에 성행했던 엄격한 형식과 특정 구조를 갖춘 14줄로 구성된 소네트 형식의 시와 스콜라 철학을 배경으로 한 고전풍의 시가 성행했고, 그 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시의 유파는 왕당파 시인들이었다. 

17세기 전기의 영국시는 주로 벤 존슨(Ben Jonson)을 주축으로 한 왕당파 시인들(Cavalier poets)과 당시 새롭게 대두된 존던을 주축으로 한 형이상학파 시인들(Metaphysical poets)의 두 유파로 나뉘어 있었다. 

벤 존슨의 서정시의 영향을 받은 써 클링(Sir John Suckling), 헤릭(Robert Herrick), 커루(Thomas Carew), 러블리스(Richard Lovelace) 등의 왕당파 시인들은 균형미 있는 정묘하고 우아한 서정시를 쓰기에 힘썼다. 그들은 대부분 상류계급에 속한 출신신분의 시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생활이 호사스럽고 문화수준이 높은 부류에 속한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원색적 경향이 짙은 연애시와 전쟁이나 왕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한편 존 던(John Donne)을 주축으로 한 일군의 시인들은 형이상학파 시운동을 전개했다. 존 던은 1608년 중병에 걸려 자살까지 생각할 지경에 이르러 「자살론」(1646)을 쓰기도 했다. 이 무렵에 그는 카톨릭에서 영국국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1609년에는 종교시 「신성 소네트」를 썼고, 애가(哀歌) 「세계의 해부」(1611)등을 썼다. 1615년에는 국왕의 도움을 받아들여 성직자로 임명되었고, 그 후 성 바울로 대성당의 사제장(司祭長)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으면서 형이상학파 시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존던의 형이상시의 영향을 받은 허버트(George Herbert), 마블(Andrew Marvell)과 헨리 본(Henry Vaughan) 등의 시인들이 존던의 형이상학파 시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왕당파 시인들과 맞서 17세기의 영국시단을 활짝 꽃피우게 했다. 형이상시는 영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유파의 시로서 이 시풍은 주로 연애시와 종교시와 더불어 가장 훌륭한 존정시, 목가시, 유상적 명상을 낳았다. 존던의 시를 보면 로마 카톨릭에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정열적인 연애시를 썼지만 1615년에 영국 국교회 사제가 된 후에는 연애시를 쓰던 정열을 종교시를 쓰는 데 전력을 쏟았다. 

♠ 형이상시의 특징 

전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시는 17세기에 들어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풍은 연애시와 종교시의 극치를 이루면서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 운동이 되기도 했다. 이런 형이상시는 기상(奇想 Conceit)이라든가 역설(Paradox), 아이러니 등을 통한 지성적인 감각, 그리고 압축된 생략 구문 등의 특징으로 극적인 언어구사에 의한 효과를 더하게 하는 특징을 가졌다. 
그러면 형이상시는 어떤 기법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1. 기상(Conceit)이다. 

기상(奇想 Conceit)은 외견상 유사성이 없는 이질적인 개념이나 이미지들을 매우 재치 있고 기발한 방법으로 비교하는 일종의 비유적 표현을 말한다. 본래 기상(Conceit)은 르네상스 시대의 소네트 작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페트라르카 기상을 말하고 있으며 대개 아름답고 잔인한 애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애인을 무덤이나 바다, 태양과 비교하는 과장된 비유법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자주 썼던 형이상학적 기상(Conceit)은 좀 더 복잡하고 지적인 경향의 기상(Conceit)으로 발전했다. 가령 어떤 관련이 없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특징과 물질계의 대상 사이를 결합하는 기법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양극화된 이질적인 사상이나 사물을 폭력적인 결합을 통해서 통합시킴으로써 시의 새로운 감동과 긴장을 유발하게 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시적 기법을 기상(Conceit)이라 한다. 즉 가장 선한 것과 가장 악한 것,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비천한 것, 가장 추상적인 것과 가장 구상적인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 영혼과 육체, 남녀, 명암 등의 양극화 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어떤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결합시킴으로써 구상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비유법의 4대 요소인 본의. 유의. 이질성. 유사성 중에서 콘시트(Conceit)에서는 유사성은 없고 양극화된 이질성만 있는 것이 특색이다. 

형이상시의 기상(奇想 Conceit)은 이질적인 두 개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상이나 신앙의 의미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드러내기 위해서 알맞은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데 주력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나 관념을 감각적인 어떤 사물이나 사건, 정황 등으로 전환되게 하는 대상이 필요하며 이것이 곧 엘리엇이 언급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엘리엇은 ‘정서를 예술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하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나타내는 방법이 된 한 쌍의 사물, 혹은 정황이나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외는 없다. 그것은 독자의 감각체험으로 끝남과 동시에 그 정서를 환기하는 사물이 아니면 안 된다.‘ 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감정의 예술적 객관화가 강조하게 될 때 이러한 객관화를 위하여 이용되는 심상, 상징, 사건 등이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다. 개인의 정서가 예술적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노출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재료상태로 남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형이상학파 시인들은 주로 개성을 최대한 억제하고, 주관적 정서를 객관화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구상화하는 데 힘을 쓰는데 이것이 곧 엘리엇이 말한 ‘몰개성이론’이다. 이런 몰개성은 시가 시인의 개성을 초월하여 완벽하게 객관화된 경지를 말한다. 

그리하여 T.S 엘리엇은 형이상시를 언급하면서 어떠한 체험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메커니즘이며 감성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가 아닌, 혼연 일체로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다. 즉 엘리엇은 ‘존 던에게는 사상을 직접 감각적으로 포착하거나 사상을 느낌으로써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어 사상을 장미향처럼 맡을 수 있고 타이프라이터의 소음과 요리냄새를 새로운 전체로 만들 수 있는 감수성의 메커니즘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그는 형이상시를 「통합된 감수성(Unified Sensibility)」이라 격찬 했었다. 사실 형이상시에서의 기상(奇想 Conceit)은 위에서 언급한 객관적 상관물과 몰개성이론과 큰 연관을 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이런 형이상시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곧 기상(Conceit)임을 감안할 때 이런 기상적 비유는 형이상시의 생명이요, 형이상학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문덕수 교수는 그의 저서 「오늘의 시작법」에서 ‘형이상시는 일차적으로 형이상성, 곧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 인식과 철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시는 철학적 · 종교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런 기상적 비유를 존던의 「사랑의 연금술」 (Love Alchemy)에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보다 더 깊이 사랑의 광산을 팠던 사람들이여 
말해보라 사랑의 행복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나도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늙을 때까지 내가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볼지라도 나는 그 숨은 신비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오 그것은 모두 사기일 뿐 
그 어떤 연금술사도 이직 영약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만일 연구 도중에 그에게 어떤 향기가 나는 것이나 
혹은 약 같은 것이 우연히 얻었다 해서 
그의 풍만한 연금 단지를 찬양하는 것처럼 
그렇게 연인들도 풍요하고 긴 기쁨을 꿈꾸지 만 
얻는 것은 단지 겨울처럼 보이는 여름밤뿐이다. 

이 시에서 존던은 ‘광산을 파는 일’ 을 ‘여자를 사랑하는 일’ 의 객관적 상관물로 설정하고 남녀의 이질적인 사랑에 대한 성격을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가장 완벽한 기상(Conceit)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여자들에 대한 그런 남자들의 사랑이 여자들에게서 금과 같은 ‘영원하고 진실한 사랑’ 을 얻는 데 목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시에서 언급된 연금술은 유럽에서는 아연. 알루미늄. 등과 같은 비금속으로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을 만들거나 또는 영약 만들기를 목표로 했고, 중국에서의 연금술은 주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거나 만병통치의 묘약 제조에 힘썼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마법은 이미 신빙성을 잃었고,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존던은 이런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연금술사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묘약에 집착한 것과 같이 남자들도 연인들의 사랑에서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다만 긴 겨울밤에 나누는 사랑같이 보이나 실은 짧은 여름밤에 나누는 사랑일 뿐, 한갓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권용각은 그의 논문 「존 던의 시에 나타난 형이상학적 기상」에서 아래와 같이 도식으로 비유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때 「임신한 여성」은 보조관념인「풍만한 연금단지」의 원관념이지만 「임신한 여성」은 다시 한번 더 비유되어 「겨울 같은 여름밤」으로 환치(換置) 된다. 그러면서 겨울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름밤처럼 짧고 순간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환기시킴으로써 육체적인 사랑의 짧고 허무함을 역설해죽고 있다. 

존던은 이 이외에도 부부의 관계를 컴퍼스의 두 발에 비유하여 고정된 다리를 여인의 역할로 움직이는 다리를 밖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다리로 묘사한다든지, 에로스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시킨다든지, 스케일 큰 사랑을 식물처럼 천천히 자라면서도 제국처럼 널리 퍼질 수 있는 「식물 같은 사랑」으로 표현함으로써 외견상 이질적인 것으로 유사성을 발견하는 등, 많은 현대 시인들도 이런 기상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형이상시는 우리나라 시인의 시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김현승의 「절대신앙」, 「마음의 집」, 김춘수의 「모자를 쓰고」, 김종삼의 「나의 본적」, 박남수의 「손」, 문덕수의 「꽃과 언어」, 박진환의 「가을 이미지」, 허영자의 「얼음과 불꽃」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김현승의 「절대신앙」과 박진환의 「가을 이미지」를 예시로 살펴보겠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풀어 줍니다. 
― 김현승, 「절대신앙」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정신세계와 사물세계를 폭력적인 결합을 통해서 융합하는 형이상시의 시적 기상(Conceit)을 발견할 수 있다. 극도의 양극성을 띠우는 두 개의 사물에서 ’화자의 눈송이‘가 ‘절대자의 불꽃’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연소되어 삼켜지는 것은 절대신앙을 가진 자만이 절대자의 불꽃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신은 사라지고 절대자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광스런 상태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의 제목인 ‘절대신앙’이 암시해주고 있다. 박진환 교수은 그의 저서「21C의 詩學」에서 ‘불태우고 있는 그리하여 뜨거움으로 다가가는 신앙의 열정을 이에 상응하는 객관적인 상관물인 ‘불꽃’ 에 연관시켜 이 불꽃인 신앙심에 스스로를 던져 하나가 됨으로써 신앙의 절대성을 획득하기 위해 불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곧 불 속에서 녹아 하나가 될 수 있는, ‘눈송이’ 에 연계시켜 등가물을 발견함으로써 육체의 소멸을 통한 정신에의 합일이라는 절대신앙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연상은 곧 컨시트(Conceit)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 라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현승이 그의 신앙의 관념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감각적인 언어로 구상화하여 완벽한 시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객관적 상관물과 정서적 등가물을 발견하고 절묘하게 항이상학적 기상(Conceit)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무게는 
잴 수 없다 

가을의 저울로 재기 전엔 
중량은 미지수다 

눈금에 새겨지는 
순금의 순도 
그런 무개와 빛깔쯤으로 
낙엽은 진다 

더러 
중량미달의 낙엽 하나 
그러나 그 속엔 
가을 무게가 들어 있다 
― 박진환,「기을 이미지」 전문 

나무 잎은 뿌리에서 뽑아 올린 수분과 영양분을 탄소동화작용과 광합성작용에 의해서 열매를 맺게 하고 가을에는 마른 잎으로 떨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열매를 위해 수분과 영양분을 다 제공하고 허깨비 마른 잎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그 아름다운 빛깔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가을은 떨어지는 무게로 수확을 측량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낙엽은 열매를 맺게 하고 중량미달의 마른 잎으로 떨어지는 무게이지만 진정한 가을의 수확량의 측정은 허깨비처럼 가벼워진 낙엽의 무게와 반비례되는 상대적인 저울로만 그 무게의 의미를 잴 수 있다. 

1-2연이 담고 있는 이런 형이하학적인 의미를 시인은 3연에서 ‘눈금에 새겨지는/ 순금의 순도/ 그런 무개와 빛깔쯤으로/ 낙엽은 진다’ 라 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고도 정신적인 중량의 척도로 그 의미를 승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풍경 속에서 가을 낙엽의 무게가 주는 정신세계와 사물세계에서 병립된 의미를 발견하고 열매를 위해 다 바치고 희생함으로써 스스로 중량미달의 마른 잎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무게에서 가을의 모든 수확량이 지닌 무게의 의미론적인 상상을 가능케 했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종연의 ‘ 더러/ 중량미달의 낙엽 하나 / 그러나 그 속엔 / 가을 무게가 들어 있다’ 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이 시가 낙엽이라고 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스스로를 희생함고 그것으로 얻어진 가을의 정신적인 가치와 물질적인 가치를 폭력적으로 결합시킨 형이상학적 기상(Conceit)을 보여주고 있다. 

박진환은 자작시 「가을의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낙엽이란 사물이지만 사물의 배후에 가을을 의미론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형이하적 전경과 형이상적 후경의 구도를 지니고 있어 양극화의 시법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시인 자신이 이 시가 형이상시임을 확인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상시에서 기상(Conceit)은 형이상시의 특징 중의 특징으로서 형이상시의 다른 모든 특징이 바로 이 기상과 관련되어 작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2, 형식의 화술이다. (대체로 대화체임) 

긴급한 혹은 열띤 논의, 극적 수사학적 형식을 취하며, 시인의 연인에게 말을 하거나, 신에게 말하거나 항의하는 매우 돌연하고 사적인 어조로 시작된다. 시어가 구어적이다. 그리고 논의하거나, 항의하거나 권유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자연히 논리적, 분석적, 혹은 심리학적이 되기 마련이다. 또 형식에 있어서 그 당시의 유행의 절정에 달했던 소네트와 다른 복잡한 서정시의 시 형식을 취했다.

사랑은 말한다,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내 영혼은 의심과 죄에 싸여 뒷걸음친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랑은내가 들어가려다가 물러서는 것을 보고 
다가와서 상냥하게 물었다. 
‘무엇이 부족해 못 들어오느냐’고, 
‘저는 여기에 들어갈 만한 손님이 못됩니다.’ 
하고 대답하자 사랑은 말했다. 
‘그대가 바로 그 손님이 되리라.’ 
나는 인정머리 없는 배은망덕한 자일까? 
‘아, 사랑이여, 
나는 당신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내 손을 잡고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 말고 누가 그대의 눈을 만들었을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저는 눈을 망쳐 버렸습니다. 
수치스러워 저는 어디로든 가야겠습니다. 
절 버려두십시오.‘ 
사랑은 말했다. ‘누가 그 멍에를 졌는지 모르느냐’고? 
‘사랑이여, 그렇다면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 
‘ㅡ자, 앉아서 내 살을 먹어라.’ 사랑은 말했다. 
나는 앉아서 그리고 먹었다. 
― 조지 허버트「사랑 ( LOVE )」 

이 시는 대화체로 논의의 전개가 이어진다. 자신의 죄의 부패성과 그에 따르는 죄책감 때문에 성찬식이나 혹은 신의 영역으로 다가서기를 주저하는 시적 화자에게 신은 문을 활짝 열어 손을 잡고 어서 들어와 내 살을 받아먹으라고 권유하는 형식의 시이다. 이 시에서 형이상시의 특징인 논리적, 분석적, 심리학적인 형식의 화술이 엿보인다. 
이 시는 인간의 모든 죄의 멍에를 대신 지고 간 십자가의 사랑이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고 수용한다는 내용의 줄거리이다. 
여기서 형이상시가 추구하는 객관적 상관물인 십자가의 사랑이 원죄의 부패성으로 신과의 분리된 관계성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회복시키는 시적 기상(Conceit)의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3, 단어는 그들의 정서의 지적 등가물로 발견하려는 시도 때문에 연상 작용이 쉽지 않은 낱말들을 택했다. 그래서 상업, 과학, 신학, 지리 등의 생경한 용어들을 더 좋아했다. 그 당시의 과학정신을 따라 분석적이었다. 

내 얼굴은 그대 눈에 그대 얼굴은 내 눈에 나타나니 
참되고 순수한 마음은 그 얼굴 속에 깃들어 있네 
어디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두 반구(半球)를 찾을 수 있을까 차가운 북쪽도, 해지는 서쪽도 없는 
죽는 것은 무엇이건 균등하게 혼합되지 못한 것 
만일 우리 둘의 사랑이 하나이고 그대와 내가 똑같이 
어느 쪽도 기울지 않게 사랑한다면, 우린 아무도 죽지 않으리 
― 존던의 「새아침 (The Good-Morrow)」 

연인들의 얼굴이 상대방의 눈 속에 비쳐지고 그들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이 그들의 얼굴에 비쳐질 때 그들의 두 생명은 하나가 된다. 이것을 시인은 지구의 두 개의 반구(半球)가 합쳐져서 어느 한 쪽도 기울어지지 않는 완벽한 지구가 된 것을 지리학적인 비유로 들어가면서, 연인들끼리의 사랑도 둘이 합쳐져서 서로의 부족분을 채우고 또 하나가 됨으로써 완벽한 사랑의 관계를 이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존던은 이런 사랑만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것을 지리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말했다. 
전자에서 예시로 언급한 존던의 「사랑의 연금술」에서도 비금속을 가지고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물리적 금속 전환술을 빗대어 생경한 과학적 단어를 구사하여 진실한 사랑의 영원성을 부정하고 있다. 

존던은 이런 과학적 종교적 역사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시의 참신성을 살렸고 17세기의 엄격한 격식을 가진 소네트 형식과 고전준의 경향의 시풍에서 형이사시의 지적이고 텐션 있는 시 형식으로 시의 성향을 한 층 격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4, 리듬도 엘리자베스조의 시처럼 고전적 유산, 혹은 음악의 필요성에 의해 암시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의 리듬은 의미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귀에 거슬리거나 거칠게 들리는데 현대적 관심에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규칙적인 스무드한 리듬보다는 훨씬 활기차고 발랄하고 극적인 효과를 얻는다. 그리고 겉 보기와는 달리 조화롭게 글들이 이어진다. 

5, 형이상시는 함축적이고 생략적인 흔치 않은 구문을 사용한다. 물론 난해성은 더할지 모르나 의미의 탄력과 밀도가 생기고 표현이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문덕수, 「꽃과 언어」의 전문 

이 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주제를 표현하고자한 언어기능이 언어로서 살아나 결실을 맺을 수도 있고 사라져 소멸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1-3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관념 형태에 머물러 있는 언어가 꽃에 닿을 때 나비처럼 소멸되는 언어가 될 수도 있고 꿀벌처럼 살아나서 생명력 있는 언어로 발전되는 수도 있다. 이렇게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암시하는 형이상학적 미의 세계를 꽃이라고 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매체로 새로운 시적 진실을 발견하고 있다. 

즉 언어가 꽃에 닿을 때 나비와 꿀벌에서 일어나는 소멸성과 생성성의 양극화 형상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전체적인 언어기능의 의미론적 해석을 시도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관념 세계를 몇 개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구상화시켰다. 이런 이질화된 현상의 총체적 결합과정에서 시의 탄력과 밀도가 생기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형이상시의 함축적인 절묘한 시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런 특징은 형이상시의 기상적 비유기능을 통해서 압축하고 생략함으로써 참신한 의미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런 형이상시의 팽팽한 긴장미학은 상반되고 상충된 양극화 현상을 폭력적으로 화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긴장이라 할 수 있다. 

6, 패러독스를 이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더욱 강렬히 분명히 표현했다. 역설은 그 진술 자체가 분명히 모순을 범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어떤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법이다. 


시에서 역설의 기능은 단순한 재치나 흥미 유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어의 일부를 이루는 기교로써 오류와 진실 간의 긴장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예를 들면 "소란한 침묵", "고독한 군중", "살아 있는 송장"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리라’ ‘눈을 감아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침묵의 소리’ ‘달콤한 슬픔’ ‘달콤한 이별’ 등은 모두 모순어법(oxymor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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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고 싶다」에서 ‘형이상시의 특색’ 일부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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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형이상시의 또 하나의 대표적 특정이 순수한 통징(痛懲)이다. 통징은 엄벌을 가하고 징벌한다는 사전적 

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통징은 이런 형벌의 의미보다는 악한 길에서의 회심을 유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풍자(anegory) 등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통징이 풍자와 다른 점은 풍자의 기능이 헐뜯고 지적하고 폭로하는 데 있다면 순수한 통징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개선과 변혁을 유도하게 하려는 기능이다. 

조규화는 그의 논문 「김현승 시연구」에서 통징에 관하여 언급하기를「통징(蒲懲)은 풍자적 요소와 인접성 내지 상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풍자가 깎아내리고, 헐뜯고, 꼬집고, 비아냥하고, 비판하고, 고발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데, 통징도 속성상 악에 대한 개선의 의도는 본질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통징이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에 의존되고, 풍자는 그런 의도의 노출이 전진 배치되는 점에서 외양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현대문명의 자연환경 파괴현상과 물질문명의 결과로 오는 배금주의 사상의 부패성을 통탄하고 통징하는 것은 형이상시가 사회구원의 측면에서 볼 때도 얼마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면서 현실을 깊이 체감하며 쓴 시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형이상시의 특성 때문에 형이상학파 시운동은 주로 존던(John Donne)이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앤드류 마블(Andrew Marvell), 헨리 본(Henry Vaughan) 등과 양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축복의 단지를 곁에 두시고, 말씀하시길,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겠노라, 

이 세상 여기저기 흩어진 부를 

이 한 줌에 다 모으리라." 



그래서 먼저 힘이 길을 뚫자, 이어서 아름다움, 

다음엔 지혜·명예·쾌락이 흘러 들어갔다. 

거의 동이 날 무렵, 하나님은 잠시 멈추셨다. 

모든 보물 중에 혼자만 남아, 

안식이 맨 바닥에 있음을 보시고.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이 보석조차 인간에게 부여한다면, 

나보다도 내 선물들을 더 숭배할 것이니, 

자연을 지은 하나님 대신, 자연에서 안식할 것이요, 

결국 우리 둘 다 패배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다른 축복은 누리나, 늘 목마른 불안에 젖게 하리라. 

인간은 풍요롭되 피로에 시달리게 하라. 그리하여 적어도, 

선(善)이 그를 인도치 못하면, 피로함이 그를 

내 품에 던질 수 있도록." 

-조지 허버트, 「도르래」전문- 


도르래로 물건을 끌어올릴 경우, 그 물건이 땅바닥에 붙어있을 때의 무게는 재로이지만 그 물건을 끌어올려 가장 높은 목적지점에 올려놓을 때의 무게는 가장 힘든 상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땅바닥에 잘싹 달라붙어 세속생활에 젖어있을 때가 가장 편안한 삶을 살아갈 때임과 동시에 절대자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세월을 살아갈 때일수록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조지 허버트는 이 시에서 태초에 조물주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축복의 단지에 힘과, 아름다움과, 지혜와 명예· 그리고 부와 쾌락 등을 흘러들어가게 했으나 안식만은 넣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고달픈 삶을 통해서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매달리면서 더욱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르래가 의미하는 형이상시의 순수한 통징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는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고된 인생과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저속하게 사는 안일한 인생, 이런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의 양극화 된 전체적인 현상을 도르래를 통해서 교묘히 결합한 형이상시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경건생활과 세속생활의 이질성을 나타내는 형이상학적인 상태를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도르래를 통해서 폭력적으로 결합한 기상(Conceit)과, 또한 형이상시의 특징 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도르래라고 하는 생경한 용어를 인용한 점에서도 이 시가 형이상시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인 형이상시의 순수한 통징이 위의 예시에서 그 좋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형이상시의 특징은 주관적인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 등을 객관적 상관물에 이입시켜 표현함으로써 시인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고 객관화되어 몰개성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그들의 기상적 비유를 통해서 동떨어지고 상반된 세계를 폭력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추상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이 감각적인 형태로 구상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순수환 통징을 통해서 인류구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 형이상시의 현대적 의미 

형이상시는 17세기 드라이든이 존던의 시가 너무 철학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명명된 말이다. 이렇게 형이상시운동이 처음부터 많은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출항했고 17세기 형이상시가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극도로 관념적이고 지적이었던 신고전주의와 개인의 감정과 열정을 중시했던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조로 인해서 잠시 매몰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이 형이상시들을 재수집하고 편집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엘리엇, 리처드, 랜슴 보우건 등이 뒤를 이어 앞 다투어 형이상시를 재평가함으로써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형이상시가 큰 각광을 받게 되이다.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에 대두되었던 문예사조는 그 당시에만 반짝 빛을 보다가 매몰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문예사조에 흡수되어지는 것이 상례이지만 17세기의 형이상시만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재조명되고 부활하여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그 찬란한 문학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그만큼 형이상시가 완벽한 시의 기법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T.S. 엘리엇은 그의 저서 〈형이상파 시인들 The Metaphysical Poets〉에서 형이상학파 시인들은 사상과 감정의 융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다음 세대의 시인들은 "감수성의 분열" 때문에 그러한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반쪽 작품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했다. 즉 그는 ‘형이상학파 시풍을 어떠한 체험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메카니즘’으로 보았고 ‘감성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혼연 일체로 만들 수 있는 능력, 통일된 감수성(Unified Sensibility)"을 지녔다고 했다. 

우리 한국시가 신시로 출발하기 시작한 1900년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성이냐 감성이냐, 관념이냐 탈관념이냐, 정서냐 감각이냐, 추상화냐 구상화냐, 관념시냐 사물시냐, 모더니즘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 등의 제반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이어져왔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모더니즘의 시의 결함을 배격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면서 해체시가 확산되어 한국시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1년경에 김기림에 의해서 당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지양하고 새롭게 탄생된 모더니즘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주지주의와 이미지즘 경향의 시를 뜻한다. 모더니즘의 시는 개성보다는 몰개성으로, 의미보다는 이미지, 통일성보다는 단편적 경향으로, 그리고 철저한 언어를 통한 회화성의 추구와, 이미지의 조형성, 이성을 주로 한 합리주의적인 성향이 짙고 자신의 지역성을 초월한 코즈모폴리턴(세계주의자)적 관심을 갖는다. 또 모더니즘은 이분법적 개념인 광명과 흑암,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과 인간,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취 등의 양극적인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그 중 상위계렬에 속한 것만 취하고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버린다. 

이런 모더니즘의 결함을 지적하고 일어난 시운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정해진 틀을 깨고 자유스러운 특징의 시법을 구사했다. 모더니즘처럼 사물의 상위계열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계열까지도 모두를 받아드리고 소화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시조인 자크 데리다의 해체논리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전통적 가치관과 절대적인 진리관을 배제하고 창조적인 가치관과 상대적인 진리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문제의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가치를 폭넓게 받아드려 시인의 시야를 넓히고 존재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공로가 있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속성이 너무도 많은 것을 해체시킨 나머지 탈중심, 탈규범 탈신성, 털권위, 탈구조, 탈언어(언어 이탈), 거기다 다원주의, 로칼리즘 등의 편향된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시 2분법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나타난 형식의 틀과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형으로 인한 응축된 형태를 해체시킴으로써 풀어쓰기시, 대화시, 이야기시, 소설시 등와 같은 산문시로 전향되었다. 이에 대해서 박진환 교수는 그의 저서 「현대시학과 시법」에서 ‘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편들을 보면 형식은 훌륭한 산문을 성립시키고 있으나 그 산문 속에 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형상의 해체가 시의 존재양식까지 해쳬시켜 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러한 생각이 과연 필자만의 것인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장점과 결함까지도 다 보완하고 양극화된 현상을 폭력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시의 기능이 오직 형이상시의 통합적 감수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통합적 감수성은 사물시와 관념시의 편향성까지도 보충하여 제3유형의 시로 변용하는 기능성을 가졌다. 문덕수 교수는 그의 저서 「오늘의 시작법」에서 ‘30 년대 미국의 비평가인 랜슴은 사물시와 관념시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시로서 형이상시를 내세우고 있다.시가 사물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한계가 있고, 관념이나 의지만으로는 편협한 것이 되므로 사물과 관념, 감각과 사상이 통합된 시가 가장 바람직한 시라는 것이다’ 라 헸다. 즉 사물시와 관념시의 한계성과 편협성을 보완하고 결합한 시가 형이상시라는 것이다. 



박진환 교수도 그의 저서 「21C 시학」에서 ‘21세기의 시가 왜 형이상시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말하기를 ‘ 첫째는 형이상시가 19세기의 시적 본질인 관념이나 사상을 20세기 시의 본질인 사물이나 이미지 일변도의 편향성을 극복, 제 3유형의 시로 제시됐다는 점과 둘째는 20세기 모더니즘 시가 정신적 어둠을 예견하고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의 광원을 지성에 찾음으로써 구원일 수 있었듯이, 21세기 시도 시대적 분화 및 핵화가 수반하는 시대적 위기의 요인을 하나의 질서로 결합, 합일, 통일시킴으로써 구원에 값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메타피지컬 포위트리의 역할 또한 동궤의 것이란 지적이다.’ 라 했다. 이 말은 형이상시가 첫째는 19세기의 관념시와 20세기이 사물시의 결함을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제3유형의 시요, 두 번째는 순수한 통징을 통한 구원의 기능을 가진 시라는 것이다. 

전자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형이상시의 이런 기능 때문에 17세기에 잠간 반짝했던 이 시운동이 200여년 만에 다시 부활하여 21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시의 모델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신규호도 그의 논문 「왜 형이상시인가」에서 21세기의 시가 이런 탁월한 시의 가능성을 가진 형이상시임을 간조하면서 ‘모더니즘의 허무주의나 리얼리즘의 현실주의로 어두웠던 20세기를 극복하고, 보다 창조적이고 수준 높은 예술성을 지닌 21세기 시를 창작하고자 고심하는 마당에 한 번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라 했다. 이 말은 극도로 난맥상을 이룬 20세기 한국시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돌파구와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21세시의 시는 오직 형이상시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형이상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기 시작한 것은 우리 문단에 가장 비중 있는 시인이며 평론가인 문덕수 교수를 비롯해서 성찬경 박진환 신규호 김지향 홍문표 교수 등 중량급에 속한 시인들이 앞으로의 한국시의 진로가 형이상시에 있음을 앞 다투어 피력하고 이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생활정서가 형이상학적인 것일 때 객관적 상관물과 정서적 등가물을 통한 형이하학적 세계의 구상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된 감수성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여기에 형이상시의 절묘한 시의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시의 선구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아무거나 먹어도 다 소화시킬 수 있는 잡식동물처럼 이 세상에서 양극화되고 이질화된 모든 것을 수용하여 소화시키고 시로 변용시킬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즉 무의미시 속에서 참된 의미를, 탈관념시 속에서 참된 관념을, 초현실 속에서 참 현실의 의미를,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사이버 공간에 저장된 무수한 이미지들을 링크하여 엮어진 집합적인 결합까지도 다 수용하는 폭넓은 통합된 감수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17세기에 대두된 형이상시가 20세에 들어와 재조명된 그런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모든 시대에서 완벽하고 영원한 시의 창조적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형이상시가 새로운 시운동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통합적 감수성을 특징으로 한 형이상시에서만이 가능하다. 



♠ 맺는 말 



형이상시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질적인 양극화를 폭력적으로 통합하고 일체화하는 시의 컨시트와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긴장, 그리고 의미의 탄력성과 밀도가 한데 어울리어 시의 균형 있는 질서를 유지하고 패러독스와 아이러니, 풍자와 순수한 통징으로 시의 구원성을 구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시가 지성적이면서도 절재 있는 감정처리와 참신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한 구상화를 이루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복하지 못한 모더니즘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관념시와 사물시를 통합한 제3유형의 시의 모텔일 수 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시운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시인들이 뛰어넘지 못한 시의 편향성을 통합된 감수성으로 극복하고 모든 상반되고 이질적인 사물을 결합하고 융화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한국적인 형이상시를 개발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될 때 미래지향적인 시의 전형적인 모델케이스로 새롭게 거듭나면서 생명감 있는 유형의 시로 발전해 갈 것이다. 


<출처: 시인의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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